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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

1. 연혁
○ 2005.08.01 전주시 완산구 완산동사무소로 행정동폐합
○ 1994.08 전주시 완산동 동완산동 1,2가 삭제
○ 1989.05 전주시 완산구 서완산동1가,2가 / 동완산동1가,2가로 개칭 (시 조례 제1591호)
○ 1957.12 완산동이 동·중·서 완산동과 남화산동으로 변경(시 조례 제108호)
○ 0000 해방직후. 완산정→완산동으로 (한국식 동명으로 개칭)

2. 유래

용머리고개 양쪽 취락지역으로 형성되어 있음

용머리고개는 年代는 정확히 나오지 않고 있으며 先祖들이 부르기를 龍머리 같다는 고개라 하여 龍頭峙(용두치)라는 제 이름으로 불리어 왔으며(당시 湖南에서 漢陽가는 길목)

옛날에는 구제날망 또는 제말랑이라고도 불렸으며 일제시대에는 완산교 다리를 건설하여 용의 형태인 산능선을 도로로 개설 용의 허리를 끊은 후로부터 용머리 고개라 구전되어 불리어 왔음

3. 지명 이야기

『지명으로 보는 전주백년, 전주문화원(2001)』

완산동의 완산(完山)은 백제 시대에 전주를 나타내는 지명으로 사용되었던 것인 만큼, 일찍이 이곳이 전주의 주요 생활권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전주의 한자어 全州와 완산의 한자어 完山은 김두규(1999)에 따르면 중국의 광서성 계림부 장족 자치구에 ‘全州’와 ‘完山’이란 지명이 있으며, 전주와 완산이라는 지명도 그에게 비롯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완산과 전주가 중국의 지명을 본뜬 것이라 하더라도, 완산의 지형으로 미루어 본다면 그러한 지명을 사용한 것이 일리가 있어 보인다. 완산동은 완산칠봉이 북쪽으로 뻗은 줄기에 에워싸여 있다. 이러한 지형은 마치 전주부성이 남쪽에서 좌우로 뻗은 산줄기들에 에워싸인 것과 닮아있다. 즉 작은 고을이었던 완산의 모습과 큰 고을 전주는 지형이 매우 흡사하며, 살기 좋은 고장이라는 뜻을 지닌 셈이다. 60년대 항공사진은 이러한 완산동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의 중앙에 네모 모양으로 비어있는 공간이 완산초등학교 운동장이다. 사진으로 볼 때 초등학교 운동장 아래가 투구봉과 검두봉이고 그 사이가 맷골이다. 북서쪽으로 뻗은 산의 마지막 부분은 용머리고개이다.

완산동은 현재 행정구역이었으나 2005. 8. 1일부로 완산동으로 통합됨. 조선시대 이곳은 부남면에 속하는 지역이었으며, 1914년 일제시대의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곤지리, 은송리 일부와 부서면의 오계리 일부를 병합하여 완산정으로 불렀다. 곤지리는 동완산동 동쪽에 있는 마을로 곤지산 밑에 있어서 곤지리(坤止里)이다. 은송리(隱松里)는 동완산동 서쪽에 있는 마을로 완산초등학교와 전주천변 사이의 마을로 추정된다. 1946년 해방 이후에 완산정을 완산동이라 고치고, 그 후 몇 차례의 행정구역 변경을 거쳐 현재에 이른다.

완산동에서 고유어로 된 지명은 맷골, 수돗골, 땀띠시암이다. 보통의 경우는 그저 완산동 혹은 동·서완동이라는 행정명칭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일제시대 주요 건물이었던 백학루와 청학루를 따라 백학루골목, 청학루골목과 서완산동의 유서 깊은 건축물인 기령당과 기령당 골목 등의 지명이 있을 뿐이다. 그러한 까닭은 이 지역은 전주천변에 형성된 시장과 지리적으로 가까워 오래 전에 타관사람들이 들어와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에서 도시화되었기 때문에 마을공동체의 개념이 자리 잡지 못했던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완산동의 마을들은, 완산동이 시작되는 곤지산 자락에서부터 천변을 따라 난 도로의 남쪽 방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아래 사진은 동완산동의 맷골을 남부시장 편에서 찍은 사진이다. 맷골은 한자로 매곡(梅谷)인데, 남부시장의 매곡교도 맷골의 한자를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니까, 맷골은 이전에도 동완산동의 주요 자연부락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맷골 위의 산자락에 형성된 동네를 통칭 투구봉동네라고도 부른다. 투구봉1)은 산의 모양이 투구처럼 생겼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마주보고 있는 봉우리는 검두봉이라 불리는데, 검두봉(劍頭峰)은 산의 모양이 칼끝처럼 생겼다고 한다. 맷골은 일제시대에 이곳에 정수장이 생긴 후로 수돗골이라고도 불렀다. 맷골에는 현재 시립도서관이 들어서 있다.

맷골 앞과 천변도로 사이의 도로가 본래의 도로이다. 이 도로를 따라 가면 왼편으로 완산초등학교를 거쳐 완산칠봉에 오르는 길이다. 완산초등학교를 지나 자율방법대에서 오른편으로 난 사잇길로 들어가면 완산칠봉 약수터이다. 이곳의 물이 맑고 또 매우 차가워서 땀띠에 걸린 사람도 이 물을 맞으면 땀띠가 없어진다고 해서 땀띠시암2) 이라고도 불렸다.

완산초등학교 남쪽 벽과 완산칠봉 사이에 있는 마을은 예전에 백운정이 있어서 백운정동네라고 불렀다고 한다. 백운정(白蕓亭)은 전 현감 백치언(白致彦)이 세웠다가 허물어진 것을 그의 증손 백남신(白南信)이 중건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자취가 전혀 남아있지 않다. 백운정 동네에서 서쪽으로 조금 가다가 산비탈로 올라서면 관음서원이다. 백운정과 짝을 이룬 건물이 청학루인데, 청학루는 1921년 당시의 갑부 박기순3)이 비장청(秘將廳) 건물을 뜯어 옮겨 짓고 청학루라 하였다. 그 후 예식장, 전주국악원 분원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그 자리에 태화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예전에는 청학루 밑의 골짜기가 소꼬리 모양의 지형이라고 하여 소꼬랭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소꼬랭이에서 남쪽으로 난 골짜기는 호래벗골이라고 불렀으며, 호래벗골 막바지에 있는 약수터 지금의 땀띠시암은 호래벗골물터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하나, 이러한 이름들은 동네 주민들에게 조차 잊혀진지 오래인 듯하다.

완산초등학교 서편 마을은 좁고 긴 골목들이 미로처럼 얽혀있다. 이곳이 예전에는 완산동의 중심마을이었다고 한다. 예전의 도로가 지금도 그대로 있어서 그런지 골목이 매우 좁고 길게 형성되어 있다. 그 마을 앞에 원각사가 있다. 원각사는 원래 완주군 소양면 위봉산에 있는 절이었는데, 1951년 9월에 이곳으로 옮겼으며 당시 전몰장병 유골 봉안소이었다고 한다. 원각사에서 서쪽으로 한 사거리를 지나면 서천교와 연결된 사거리이다. 지금은 흔히 서천교 사거리 혹은 완산교회 앞이라고 불리는데, 그런 점으로 보면 완산교회라는 이름 자체가 현재는 주요 지명으로 사용되는 셈이다.

완산교회에서 완산칠봉 쪽으로 난 길이 청학루골목이다. 청학루골목에서 새로난 소방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가면 기령당길4)이다. 기령당은 본래 군자정이었는데, 군자정은 조선조 현종 3년(1662년)에 전주의 유지들이 용머리고개의 동쪽 기슭 평지에 (현 엠마오 사랑병원 부근) 세운 정자이었다. 군자정은 전주의 유지들이 활을 쏘며 교유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는데, 군자정에 딸린 과녁판은 군자정의 동편에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영조 43년(1767년) 3월 21일 오전 10시경에 서문 밖 민가에서 난 불이 때마침 불던 광풍으로 말미암아 삽시간에 전주부성을 덮쳐 천여 가호를 때우고 그 불길이 서천을 넘어 군자정까지 태워 버렸다고 한다. 그 때 군자정의 현판이 바람에 날려 이곳 잔등에 떨어지자 이것은 곧 지신의 조심이라 하여 이곳에 터를 다져 정자를 세웠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박병연 1995). 군자정은 정조 12년에 이곳 기령당 자리로 옮겨졌다. 그러나, 그 후 1912년 사립 육영학교가 만들어지면서 전주부내의 세 사정 군자정, 다가정, 읍양정이 천양정으로 합정하였다. 그 후 군자정은 기령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전주 유지들이 드나드는 경로당으로 운영되고 있다.5) 기령당에는 특히 고려말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주에 부임하는 기관장들의 방명록인 선생안이 남아있다.

전주부성에서 김제 방향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완산교와 용머리고개를 지나야만 한다. 완산교는 소금전다리, 염전교 등으로도 불렀는데, 1936년 홍수로 유실되었던 것을 1937년에 콘크리트 다리로 개설되었다고 한다.

완산교와 용머리고개 사이 서쪽 산 다가공원 아래 방향으로 자리 잡은 동네도 서완산동에 포함된다.

이 동네는 조선시대에 얼음을 저장하는 빙고가 있었다고 하여 빙고리(氷庫里)6)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이곳 사람들은 빙고리나, 군자정 등의 지명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며, 오로지 서완산동이라는 행정구역명칭만을 사용하고 있다. 전주의 도심 확장 과정에서 이전의 마을 이름은 이미 사라진 셈이다.

완산동 시외버스 간이 승강장을 지나 오른편으로 난 골목길로 들어서면, 완산사를 만날 수 있다. 완산사는 가락(김해) 김씨 종친회에서 관리하고 있는데, 신라 김유신 장군이 삼국통일을 이룰 당시 이곳에 들렀던 것을 기념하여 지었다고 한다.

완산동 용머리 고개는 서완산동 남쪽에서 김제, 금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용머리고개라는 이름은 산의 모양이 용의 머리와 같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아래 사진은 비교적 산의 모양이 보존되어 있던 60년대의 항공사진이다. 이 사진의 왼쪽 하단이 용머리고개이고 오른쪽 상단이 어은골산이다. 용머리고개에는 몇몇 설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용머리 고개에서 유연대를 지나 어은골산에 이르는 산의 모양이 용의 모양과 흡사한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닌 듯하다.

용머리 고개7)에는 특히 강감찬 장군과 관련된 설화가 남아있다. 강감찬 장군이 이곳에 머물던 어느 해, 가뭄이 심하게 들어 걱정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강감찬이 하인을 시켜 지금 막 내를 건너는 초립동이가 있을 터이니, 그를 곧 데려 오라고 일러 보냈다고 한다. 하인이 그 말을 듣고 그곳에 가보니, 과연 그런 사람이 있어 그를 강감찬에게 데려갔다고 한다. 그러자 강감찬을 그를 보고 이렇게 가물어도 못 본 체하고 지나가느냐고 꾸짖으며, 당장 비를 내리게 하지 않으면 목을 베겠노라 하였다고 한다. 그 초립동이는 잠시 사람으로 둔갑한 것이었는데, 곧 승천하려 하였다가 강감찬의 일갈을 듣고 비를 내리게 한 뒤 이곳 용머리 고개 부근에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그 후 강감찬은 그 용을 후하게 장사지내 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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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투구봉 : 산세가 마치 군인들의 투구처럼 보인다고 해서 투구봉이라 불리고 있는데 완산칠봉의 봉우리 가운데 유달리 벼락을 많이 맞아 나무 하나도 살아남지 못한 밋밋한 산등선이로 남아있다. 설에 의하면 산꼭대기에 철이 많이 숨겨 있어 벼락과 뜻이 맞아 자주 벽락을 맞았다고 한다.(전주시지 1997, 130쪽)

2) 땀띠샘(玉梅泉) : 완산칠봉에 약수터가 있다는 것조차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하물며 옥매천이라고 하면 더더욱 모를 것이다. 요즘 한창 인기 높은 좁은목의 약수터는 많은 돈을 들여 번듯하게 개발하고 조경도 하여 명물로 등장했다. 하루종일 주먹만한 파이프를 통해 쏟아지는 물줄기는 자칫 전주천이 범람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할 만큼 수압이 줄기차다. 다가산에는 일제의 신사가 들어 있었다고 해서 시민의 사랑를 받지 못하는데 비해 완산칠봉은 한국의 정취를 자아내고 산신이 전주를 지키고 있다고 해서 전주시민의 기상과 긍지를 높여주고 있다. 산림도 울창해서 삼복더위의 피서지로 유명할 정도로 완산칠봉 전체가 시원스럽다. 지금의 팔각정(八角亭)을 쳐다볼 수 있는 칠성암 밑줄기 계곡에 조그마한 약수터가 있다. 본래 약수는 많은 물이 쏟아지지 않고 귀하게 고이는 맑은 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완산칠봉이 약수터는 땀띠샘이라고 해야 얼른 알아들을 정도로 50대 이상은 추억에 젖는다. 약수를 마시면 무병한다는 설화도 있고 약수로 몸을 씻으면 땀띠가 나지 않는다고 하여 50년대 무렵만 해도 많은 인파가 들끌었다. 여기저기에서 노인네들의 청아한 시조 가락이 넘치고 장기나 바둑을 두는 모습도 정겨웠으며 약수터 주변에는 쪽박을 들고 졸졸 떨어지는 약수를 받아 먹으려는 남녀노소로 들끓었다. 전주 이씨들은 완산이 발상지라는 점을 봐서 조상의 신이 완산칠봉에 내렸다고 하여 보호하는 전통이 있으며, 옥매천(玉梅泉)이란 연유는 완산칠봉의 장군대좌봉(將軍大坐峰), 옥녀봉(玉女峰), 반선봉(盤膳峰), 옥저봉(玉著峰), 복부봉(伏釜峰), 탄금봉(彈琴峰), 매화봉(매화봉) 등 일곱 봉우리의 정기에서 흘러내리는데 특히 첫 번째 봉우리인 옥녀봉과 마지막 봉우리인 매화봉의 머리 글자를 따서 옥매천이라고 했으나 완산칠봉의 약수터는 역시 땀띠샘이라고 해야 정취가 그윽하다. 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완산칠봉 밑에 있는 완산초등학교에는 강당이 없었기 때문에 졸업 때는땀띠샘 계곡에서 졸업식을 가졌는데 졸업식 날 땀띠샘이 바닥이 날 정도로 다 마셔 버리기도 했다.(전라도 풍물기, 288-290쪽)

3) 전주에서만 14대를 살아 오셨다는 서예가 하곡 박병연 선생(87세)에 따르면, 박기순은 본래 충청도 사람인데 왜정시대 상업은행 두취(은행장)를 하였다고 한다. 박기순이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까닭은 그의 아들 박영철이 일본군 대좌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박기순은 전주의 주요 시설물의 중건 혹은 창건과 관련하여 자주 거명되는 이름인데, 서천교, 청학루, 덕진연못의 취향정 등의 중·창건에 관여하였으며, 기령당 당장과 천양정 사장을 지냈다고 한다.

4) 현종 때 세운 군자정을 오늘날에는 기령당이라고 한다. 본재 군자정은 용두봉을 지나 반선봉을 건너 옥적봉인 빙고동 아래의 산 부리에 있었다. 영조 때 서문 밖 민가에 큰불이 일어났었는데 뜻밖에 광풍이 몰아쳐 삽시간에 부성 안은 화염에 휩싸였다.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는 불길은 단숨에 서천을 넘어 군자정까지 태워버렸다. 그런데 군자정에 있던 현판이 바람에 날려 이곳 잔등에 떨어지자 지신(地神)의 조짐이라 하여 선비들이 목욕재계하고 다시 군자정을 세웠는데 현재는 기령당(耆寧堂)이라고 한다.(전주시지 1997, 118쪽)

5) 기령당은 한때 사유지가 되어 절로 이용된 적이 있었는데, 부호 인창섭씨가 거금을 들여 기령당을 매입하여 기증함으로써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6) 빙고의 위치는 구 예수병원 아래이었다고 한다. 토박이 화자들은 이곳을 빙고장이라 불렸으며,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파 놓은 굴이 있었다고 한다.

7) 용머리고개 : 마한의 기운이 쇠잔할 당시 민가에서 머리는 하나인데 몸뚱이가 둘 달린 소를 낳은 이변이 생겼다.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일수일신(一首一身)이 태어나고 홍수가 범람하는 것은 용왕이 크게 일어날 징조라고 하자 인심은 날로 흉흉해졌다. 이때 전주천 물이 지금의 다가산 밑에서 급한 소를 이루어 물이 많았고 물살 또한 급류였다. 일수이신의 송아지가 태어난 것은 일본관헌의 농락이었고, 이 전주천에서 자란 용이 천년을 기다려 승천하려고 안간힘을 쓰느라고 전주천 물을 모조리 삼키고 하늘에 오르려고 힘을 한번 쓰다가 힘이 빠져 떨어지고 말았는데 사실은 힘이 빠진 것이 아니라 천년에서 하루가 모자란 것이었다고 한다. 이때 용이 떨어진 곳은 완산칠봉의 계곡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사람이 다니지 않았던 원시림이었다. 몸부림치다가 승천하지 못한 한을 품고 용의 머리가 지금이 용머리 고개에 떨어졌으며, 이후로는 우거진 송림이 정리작업을 한 듯 깨끗하게 오솔길이 만들어짐으로써 오늘날은 경목선이 되었고, 용머리의 형상이라고 하여 용머리고개라고 하였다.(전주시지 1997, 126쪽)
8) 완산칠봉 이야기
전주와 완주에는 완산승경이 있습니다. 승경(勝景)은 ‘뛰어나게 좋은 경치’를 말하며, 전주팔경(全州八景)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완산승경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낯설기도 합니다.
완산승경은 모두 32 곳에 이르며, 완산승경 중에는 전주팔경 5 곳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완산칠봉(完山七峰)은 완산승경에 포함되며 전주를 상징합니다.
완산칠봉 가운데 가장 높은 완산수봉의 높이는 186미터이며, 크게 정면의 내칠봉과 후면의 외칠봉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정면의 내칠봉은 수봉인 장군봉을 시작으로 동쪽으로 탄금봉, 매화봉, 옥녀봉, 무학봉, 백운봉, 용두봉이며 일반적으로 완산칠봉으로 지칭되고 있으며,
후면의 외칠봉도 수봉인 장군봉을 시작으로 남쪽으로 검무봉, 선인봉, 모란봉, 금사봉, 매화봉, 도화봉이고 현재 아파트들이 있는 지역들은 꽃밭정이라고 불렀으며,
현재 정혜사가 있는곳은 완산의 산형이 기러기 형상이라 하여 지금도 그곳을 안행사, 그지역을 안행지구라고 불러지고 있습니다.
또한 완산칠봉은 1894년 5월31일 전주부성을 점령하여 입성한 동학혁명군과 6월4일 뒤쫓아온 홍계훈이 이끄는 관군이 대치하여 격전을 벌였던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완산칠봉은 1봉에서부터 7봉까지 있는데, 이 모습은 마치 한 마리의 용이 하늘로 오르려는 듯하며 용의 머리가 완산동 고개 방면으로 조아리고 있다고 하여 이 고개를 ‘용머리 고개’라고 했습니다.
전주시의 중앙부로 흐르는 전주천을 따라 기러기 형상으로 이어진 산줄기가 전주시민의 휴식처인 완산칠봉이며 일곱송이 멧부리는 지상에 돋아난 북두성좌라 했고 남천, 서천은 은하수라 했습니다.

연혁

년/월 연혁
2005.08.01 전주시 완산구 완산동사무소로 행정동폐합
1994.08 전주시 완산동 동완산동 1,2가 삭제
1989.05 전주시 완산구 서완산동1가,2가 / 동완산동1가,2가로 개칭 (시 조례 제1591호)
1957.12 완산동이 동‧중‧서 완산동과 남화산동으로 변경(시 조례 제108호)
0000 해방직후. 완산정→완산동으로 (한국식 동명으로 개칭)